한국전력공사(KEPCO, 이하 한전)는 올해 2월까지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HSBC, 시티은행 등 글로벌 주요 금융기관의 지원 아래 글로벌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왔다.
그러나 지난 6월, 한전은 만기가 도래한 미국 달러 채권을 재발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통상적으로 국제 시장에서 채권 재발행을 통해 재정 유동성을 확보해 온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조치다.
이는 재정과 관련한 전략적이고 일시적인 조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일부에서는 국제 금융기관들이 점차 한전과 같은 화석연료 기반 기업에 대한 지원을 재고하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그린워싱으로 지역주민 피해 감추면 안돼
기후솔루션은 최근 '새로운 채권도 없고 정의도 없다'는 글에서 한전이 운영하는 필리핀 세부주 나가시 석탄 화력발전소 인근 지역 주민들의 심각한 환경오염 피해를 전했다.
이에 따르면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분진과 오염으로 어획량 감소, 건강 악화, 생태계 파괴가 이어졌지만 주민들의 항의에도 한전 등은 이 문제에 대해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재생에너지 기업 관계자는 “한전은 이미 재정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염적이고 파괴적인 사업에 계속 집착하고 있다"면서 "필리핀 사례는 '클린 콜(clean coal, 청정한 석탄)'이 허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린워싱’으로 화석연료 투자와 그 피해를 감추려고 하는 행위는 기후위기에 책임을 져야 할 한국 공기업의 태도가 아니란 것이다.
금융권의 시험대…“과감한 선택이 필요”
물론 글로벌 자본 시장은 여전히 석탄 등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전이 이번에 글로벌 채권을 재발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금 회전이 막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3월 기준 479.69%의 높은 부채비율 등 한전의 가중되는 경영난은 분명한 위험 신호다. 정부는 비용 절감과 '자구 노력의 엄격한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국내 채권 시장의 경색 속에 해외 채권 발행은 여전히 중요한 선택지다. 기후솔루션은 "한전은 2020년 이후 글로벌 채권 발행 규모를 대폭 확대했으며, 이는 부채 구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민사회 단체들이 한전의 주요 투자자들과 인수기관에 ‘자금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공동 서한을 발송하고, 채권 발행의 기후 위협성을 지적하는 연구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싱가포르 증권거래소에 제기된 한 소송은 한전이 채권 발행 당시 기후 관련 위험을 제대로 공시하지 않았다는 점도 거론했다.
책임의 시간…“이제는 금융기관의 선택”
기후솔루션은 "나가시의 주민들이 겪는 피해를 생각하면 한전의 화석연료 고집은 국경을 넘는 문제를 낳고 있다"면서 "이를 가능하게 한 자금 흐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한전의 글로벌 채권 발행이 없었던 것은 한전의 화석연료 사업 철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전은 여전히 국내외에서 석탄 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그러나 세계 은행들이 화석 연료 피해와 깊이 연관된 전력회사에 대한 지원을 거둬들이게 되면 한전을 비롯 석탄발전 등에 치중한 기업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기후솔루션은 "한전이 향후 채권 발행에 나설 때 금융기관들은 당장의 수익이 아니라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제 금융권의 시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