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지질시대 '인류세'는 이미 열렸다
편집자 주: 플래닛리터러시는 'Climate Intelligence'를 테마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재생에너지 투자플랫폼(금융치료)'을 시작으로기후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와 의미를 다룹니다.이번에는 인간이
지구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는 인식을 담은 '인류세'의 의미를 담습니다.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세계지질과학총회(IGC)가 열립니다. 이 행사는 국제지질과학연맹(IUGS) 주최로 4년마다 열리는데, ‘지질과학 올림픽’으로 불립니다. 1878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했고 한국에서 열리는 건 처음입니다. 지질학(地質學, Geology)은 자연과학의 한 분과로 지구를 이루는 물질들의 특성과 구조, 형성 과정 등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번 총회는 ‘위대한 여행자-하나가 되는 지구로의 항해’를 슬로건으로 120여 개국, 7천여 명 참석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역대 최고 규모에 걸맞게 지구 환경 변화와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과 협력 등을 약속하는 ‘부산 선언’도 채택할 예정입니다.
총회에 앞서 지난해부터 지질과학계 최대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지질시대 변경 건이었습니다. 46억 년 지구 나이를 지질학적으로 나눈 지질시대를 보면, 현재 인류는 ‘신생대 4기 홀로세(Holocene)’를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안정돼 농경을 시작한 약 1만 1700년 전부터 홀로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문명이 지구에 축적시키는 상처
그런데 2000년에 나온 한 주장이 지질 시대를 뒤흔들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J. Crutzen)이 ‘국제지구권생물권연구(IGBP)’ 뉴스레터에서 주창한 ‘인류세’ 때문입니다. 인류세 영문 표기 ‘Anthropocene’는 사람(anthropo-)에 '세'를 뜻하는 접미사(-cene)가 결합한 것으로 지질 및 생태에 끼치는 인류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미국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도 1980년대에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 인류세 용어를 전파한 사람은 크뤼천입니다. 그는 산업혁명 기점으로 온실가스 농도가 증가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인류세를 꾸준히 강조했는데요. 이후 2015년 그를 포함한 과학자들이 함께 20세기 중반이 인류세의 본격적인 시기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점점 연구자들이 ‘인류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인류가 만든 시대’를 인정하자는 요구는 합당해 보였으니까요. 갈수록 심각해지는 지구온난화와 같은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상실, 화석연료 연소 등에 따른 퇴적물 변화 등의 요인을 드러내는 방대한 데이터가 그것을 뒷받침했습니다. 인류가 이룬 문명적 성취는 자연을 착취하고 지구 환경을 악화시킨 데 따른 결과였습니다.
2009년 국제지질학연합(IUGS)은 산하에 ‘인류세워킹그룹(AWG)’을 신설했고, AWG는 2023년 캐나다 크로포드(crawford) 호수를 대표 지역으로 선정하고 인류세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IUGS 산하 제4기층서 소위원회는 이를 투표에 올렸습니다. 60% 이상 찬성이 나오면 부산 IGC에서 최초로 인류세를 공표할 거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부산은 새로운 지질 시대를 여는 도시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플라스틱 화석은 '대가속기'의 풍경이다
2019년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3부작은 ‘닭들의 행성’과 ‘플라스틱 화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습니다. 연출가 최평순 PD는 인류세를 산 인간이 후세에 남길 것으로 “닭 뼈나 플라스틱”을 꼽았습니다. 인류세를 특징짓는 대표 지표인 셈이지요.
그런데 인류세를 산 현생인류의 대표 흔적이 닭 뼈라니 놀랄 만도 하지만, 한 해 도살당하는 닭이 650억 마리라고 하니 할 말을 잃습니다. 80억 명 지구인의 8배를 넘어서는 규모인데요. 이쯤이면 인류가 지구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1950년대 이후 인구 증가, 가파른 산업화와 이에 따른 에너지 소비, 인간의 다양한 활동은 기후와 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가속기(The Great Acceleration)’입니다. 2023년 8월 독일에서 열린 ‘한·유럽 과학기술대회(EKC)’에서 이은영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지질학과 박사는 “인간은 알루미늄과 콘크리트, 플라스틱 등 인위적 재료를 만들어 냈고 이를 통해 쌓인 층서학적 신호는 기존 홀로세를 분명히 넘어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쓰레기는 역사입니다. 고고학에서도 버려진 무기, 망가진 항아리, 음식물 찌꺼기에 베어 문 흔적 등으로 옛 문명을 탐색합니다. ≪웨이스트 랜드≫ 저자 올리버 프랭클린-월리스(저널리스트)는 “쓰레기는 인류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먹었으며, 어떻게 농사를 짓고 싸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고 숭배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산 선언...지구 환경 변화의 책임 쓴다
미국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 윌리엄 라셰도 쓰레기 매립장을 연구하면서 “우리가 버린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버린 쓰레기를 토대로 현 지질 시대 변경을 추진했던 AWG의 제안은 결과적으로 부결됐습니다. 올 3월 IUGS 산하 제4기층서 소위원회에서 구성원 중 66%가 반대표를 던져 인류세 도입은 일단 무산됐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을 부정한 학자는 거의 없었지만, 70년에 불과한 연대가 너무 짧아서 인류세 도입은 성급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산에서 인류세를 선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세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지구 환경의 급변 상황을 대표할 수 있는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9월에 열리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는 ‘새로운 울림: 인류세 시대의 예술과 기술(Echoes of Tomorrow: Soundscapes in the Age of Advanced Computing)’을 주제로 열리는 심포지엄으로 인류세의 울림을 전합니다.
한편, 이번 IGC는 우주 행성 분야에 대한 지질학의 관심을 보여주는 우주행성지질을 비롯해 탄소중립, 자원, 원자력, 방사성폐기물, 지질공원관광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룹니다. 특히 세계 지질학자들에게 기후위기에 대한 역할과 임무를 부여하고 지구 환경 변화를 연구‧교육할 수 있는 미래지구환경과학센터(가칭)의 부산 설치 제안 등을 담은 ‘부산 선언’이 나올 예정입니다. 인류세를 쌓아가는 오늘의 시대가 겪을 위기와 기회를 담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