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대응과 산업 경쟁력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유럽연합(EU)의 움직임이 속도를 내고 있다. EU는 올해 들어 발표한‘경쟁력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 ‘청정산업협약(Clean Industrial Deal)’, ‘옴니버스 패키지(Omnibus Package)를 통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협약과 패키지는 모두 중소기업의 규제 부담 완화, 고탄소 산업의 탈탄소 전환 지원, 전환금융 활성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1월 29일 가장 먼저 발표된 '경쟁력 나침반'은 역내 경제 활성화 및 기후 중립 달성을 위한 향후 5년간의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 혁신 격차 해소, △ 탈탄소화, △ 공급망 안보 등의 3대 핵심 과제와 △ 규제 부담 완화, △ 단일시장 활용, △ 자금조달 지원, △ 일자리 확대, △ 회원국 간 정책 조율 강화 등 5대 실행 계획을 담았다. EU의 역외 의존도를 낮춰 경제적 자율성을 강화하고, 기술혁신을 주도하는 지속가능한 성장 모델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이다.
이어 2월 옴니버스 패키지와 청정산업협약을 잇달아 공개했다. 옴니버스 패키지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EU 분류체계(Taxonomy) 법률 개정안을 포함하여 EU의 ESG 핵심 정책의 간소화 방안을 다뤘다.

핵심 내용은 EU의 과도한 규제가 기업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판단 하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보고·행정 부담을 각각 최소 25%와 35% 감축하는 것이다. 또 EU 지속가능성 공시지침(CSRD)과 지속가능성 실사(CSDDD)의 시행 시기를 2028년까지 연기하고 CSRD의 적용대상에 대한 기준을 대기업으로 한정하여 CSDDD의 적용 대상과 일치시켰다.
CSRD/CSDDD 대상 대기업은 EU 내 상장기업 중 고용이 1,000명을 초과하고 전 세계 매출이 5,000만 유로 또는 자산이 2,500만 유로를 초과하는 기업이다.
여기에 EU 분류체계의 적용 기준 완화, 공급망 보고에 대한 기준을 낮춰 중소기업 부담 완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간소화 등을 포함했다. EU 분류체계 법률 개정안에서는 공시 양식 간소화로 자료 입력 항목을 70% 감소시켜 중소기업과 은행의 공시 행정 부담을 대폭 완화했다.
또 중요성(materiality) 기준을 도입하여 분류체계 적격 활동(eligible activity)이 10% 미만인 기업은 적격성(eligibility) 및 적합성(alignment) 공시 의무를 면제하는 등 분류체계 연계 공시(Taxonomy-aligned Disclosures) 규정을 완화하여 유연성을 부여했다.
EU 분류체계를 벤치마킹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에서는 기술적 심사 기준을 △ 활동(적격활동 여부), △ 인정(SC), △ 배제(DHSH), △ 보호(MS) 기준으로 정의하고 있다.
옴니버스 패키지에 제시된 개정안은 회원국 간의 의견수렴을 거쳐 채택되며, 유럽의회 및 이사회 검토가 완료된 후 시행될 예정이다.
청정산업협약은 2050년 탄소중립 달성과 순환 경제 확산 등 환경 목표는 유지하면서, EU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탈탄소화를 촉진하기 위해 고탄소 제조업의 탈탄소화 지원과 청정기술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세부 지원 분야로는 △ 에너지 비용 절감, △ 청정제품 수요 진작, △ 전환 부문 금융 지원, △ 순환성 및 원자재 확보, △ 글로벌 협력 확대, △ 양질의 일자리 확대 등을 꼽았다.
이 가운데 전환 부문 금융 지원은 탈탄소 전환을 위한 금융지원을 위해 보조금 개편, 혁신 기금 강화 및 1,000억 유로 규모의 탈탄소화 전문 은행 제안, 호라이즌 유럽 프로그램을 통한 연구 및 혁신 촉진, InvestEU 개정을 통한 금융 보증 규모 확대 및 최대 500억 유로의 투자 유치 등을 제시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친환경 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하는 시점에서 옴니버스 패키지로 인해 EU도 친환경 및 ESG 정책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EU는 청정산업협약을 통해 2050년 탄소중립과 순환경제 확산이라는 환경 목표의 지속적인 추진은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KIF)이 이달 공개한 금융브리프 포커스 '유럽의 ESG 규제 간소화가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에 따르면 "일각에서는 우리나라도 속도 조절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은 EU나 미국에 비해 친환경 정책과 지속가능금융 도입이 늦었으며, 제도 정착과 시장 신뢰 확보가 더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오히려 지속가능금융을 강화하는 친환경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만큼 친환경 정책과 지속가능금융의 동력이 전 세계적으로 약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금융연구원은 "EU는 중소기업의 자발적 공시를 허용하고 공시 기준도 간소화해 부담을 줄였다"며 "한국도 중소·중견기업의 과도한 부담을 막기 위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금융위원회가 예고한 ‘한국형 전환금융’ 정책은 주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관련 정책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선 명확한 기준 설정, 철저한 모니터링 체계, 중소기업의 현실을 고려한 정책 설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