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의 경영 화두로 자리 잡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인공지능(AI)과 빠르게 맞물리며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AI는 ESG의 실천 속도를 높이고 정밀성을 강화하는 혁신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신뢰와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는 리스크도 안고 있어서다. 기술이 ESG의 동반자가 되느냐, 혹은 위협 요소로 작용하느냐는 결국 ‘책임 있는 활용’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호주 국가인공지능센터가 발간한 'ESG 실무자를 위한 AI와 ESG 입문 가이드' 보고서는 “AI는 보고 자동화, 기후위기 대응, 사회적 가치 증진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지만, 데이터 편향과 프라이버시 침해, 과도한 에너지 소비 같은 부작용도 명확하다”며 균형 잡힌 접근을 강조했다.

ESG 보고·기후 대응·사회적 가치 기여
ESG 경영의 실무에서 가장 큰 과제는 방대한 데이터의 수집과 검증이다.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 자원 사용량, 공급망 리스크 등 수많은 지표를 파악해 보고해야 하지만, 기존 방식으로는 정확성과 신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AI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데 최적화된 도구다. 머신러닝과 자동화 시스템은 불완전한 데이터를 보완하고, 누락된 정보를 추적하며, 보고 과정을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로써 ESG 보고의 투명성이 강화되고, 투자자와 규제 당국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기후대응에서도 AI의 가능성은 두드러진다. 발전소와 운송망의 운영 효율을 높이고, 에너지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 전력망 안정성을 확보한다. 미국 에너지부는 “AI 최적화 기술을 통해 향후 3~5년 내 최대 1억㎿의 전력 공급 여력이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는 미국 전체 전력 수요의 13%에 달하는 규모다.
환경 복원에도 AI가 활용된다. 호주의 연구기관 CSIRO는 구글 등과 협력해 사라져가는 자이언트 켈프 숲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해양 생태계 보전과 탄소 흡수 확대라는 이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 예방, 장애인 고용 지원까지
AI는 사회적 책임(S) 영역에서도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호주의 커먼웰스은행은 매년 40만 건 이상 발생하는 ‘소액 송금 메시지 폭력’을 AI로 차단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 고객에게 소액 송금과 함께 욕설이나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는 은밀한 가정폭력의 전조를 탐지해 막아내는 것이다. 금융 데이터 분석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안전망으로 확장된 사례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앱 ‘Be My Eyes’ 역시 주목받는다. 고객센터와 연결해 사용자가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데, AI를 활용해 접근성과 포용성을 강화한 대표적 사례다.
호주의 한 장애인 고용 컨설팅 기업은 “AI가 보조기술과 스마트 학습 도구를 통해 장애인 포용 고용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문제는 여전히 난제
AI의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ESG 관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험 요인도 적지 않다.
첫째, 데이터 편향이다. AI는 학습 데이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만약 성별·인종·계층의 불균형이 학습 과정에 반영된다면, 채용 과정이나 금융 의사결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문제다.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는 사이버 공격, 금융사기, 딥페이크 등 신종 범죄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실제로 범죄 조직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불법거래나 인권 유린에 활용하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셋째, 환경적 부담도 크다. 대규모 생성형 AI 모델을 학습·운영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과 수자원이 소비된다. 2019년 기준 전 세계 전자폐기물은 5,360만 톤에 달했지만, 이 중 공식적으로 재활용된 비율은 17%에 불과했다. ESG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기술이 되레 탄소 배출과 자원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첨단 기술에서 지속가능성 수단으로 관리
이 때문에 호주를 비롯한 각국은 ‘책임 있는 AI(Responsible AI)’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호주는 ▲인간 중심 가치 ▲공정성 ▲투명성 ▲책임성 등을 8대 윤리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는 ESG의 기본 원칙과 맞닿아 있다.
특히 ‘AI 임팩트 내비게이터(AI Impact Navigator)’라는 도구를 개발해, 기업들이 AI 활용이 사회적 신뢰 확보, 노동과 생산성 향상, 공동체 영향 관리, 소비자 권리 보호 등 네 가지 방향에 기여하는지를 점검할 수 있도록 했다. ESG 담당자들이 AI를 새로운 첨단 기술이 아닌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관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보고서는 "기업이 AI를 책임 있게 관리한다는 인식을 주면 소비자나 시민이 AI를 더 신뢰하고 실제 사용·지지·허용하려는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신뢰 확보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의미다.
한국 기업들도 ESG 경영을 강화하며 동시에 AI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ESG와 AI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아직 부족하다.
ESG 관점에서 AI의 책임성 논의 필요하다
첫째, ESG 보고 체계의 자동화가 필요하다. 배출량, 자원 효율성, 공급망 투명성은 AI를 활용해 더 정밀하고 신속하게 관리할 수 있다. 둘째, 개인정보 보호와 편향 방지 체계를 ESG 지배구조에 통합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신뢰와 직결된다.
셋째, AI가 야기하는 환경적 부담을 평가하고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AI 운영 과정에서의 에너지 사용량과 전자폐기물 처리 문제는 ESG 보고서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더욱이 한국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산업이 AI 확산의 기반이 되는 만큼, 에너지 효율적 기술 개발과 재생에너지 활용이 뒷받침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ESG 관점에서 AI를 어떻게 책임 있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AI는 ESG 성과를 높이는 동시에 ESG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며 “기술을 어떻게 관리하고 책임 있게 사용하는지가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