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이른바 국내 ‘4대 산업’이 글로벌 공급과잉과 탈탄소 요구로 이중고에 직면한 가운데, 이들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위한 ‘무탄소 전력’ 확보가 시급하다는 업계의 진단이 나왔다. 산업계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정부의 전력구매계약(PPA)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경제인협회(FKI)가 이달 초 내놓은 'PPA 제도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제: 4대산업 무탄소전력 초과수요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부터 2038년까지 4대 산업의 연평균 무탄소 전력 초과수요를 51.2TWh로 추산했다.
이는 예상 공급량 대비 충당률이 71.3%에 불과함을 의미하며, 현행 제도로는 산업계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특히 글로벌 빅테크 및 원청기업들의 온실가스 감축 요구가 강화되면서 국내 기업들 역시 무탄소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은 납품업체에 탄소배출 감축을 요구하고 있으며, RE100이나 24/7 CFE 캠페인을 통해 실시간 무탄소전력 사용을 촉진하고 있다.

“기업은 원전 원한다”…PPA 대상 확대 목소리 커져
보고서는 국내 산업계의 저탄소 전환을 가로막는 주요 장벽으로 ▲에너지·환경 정책의 불확실성 ▲무탄소 전력원 인정 범위의 제한 ▲PPA 지원체계 미비 등을 꼽았다.
특히 현재 PPA 제도는 재생에너지로 한정돼 있어 공급이 불안정할 뿐 아니라, 고비용 부담이 기업들의 참여를 저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원자력 등 기존 무탄소 전력을 포함한 기술중립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행 전기사업법상 PPA의 대상은 ‘재생에너지’로 한정돼 있다.
실제로 미국, 프랑스, 스웨덴 등은 원자력을 활용한 PPA를 확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일부 데이터센터는 재가동 원전을 활용해 장기 PPA를 체결했고,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기반으로 한 계약도 진행 중이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혼합한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구성 중인 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은 대표적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원자력·청정수소 등 기술 중립적 무탄소전력 공급 체계를 도입해, 기업이 에너지원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양한 무탄소 전력원을 기업 관점에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력배출계수 공개 주기 단축...영국은 30분 단위
보고서는 이와 함께 전력배출계수의 공개 주기를 단축하고, 기업이 PPA를 통해 전기를 구매할 때 발생하는 부대비용(망 이용료, 전력기반기금 등)을 한시적으로 면제하거나 경감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현재 한국의 전력배출계수는 2~3년 단위로 비정기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반면 영국은 30분 단위, 미국은 연단위로 전력 배출계수를 공개하고 있다.
아울러 전력공급 체계와 관련해, 현행 전기사업법에 무탄소에너지 공급사업자 개념을 도입하고, 원전 기반 전력도 계약을 통해 거래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재생에너지 만으로는 공급의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원전 등 다양한 무탄소 전력원을 포괄하는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전 이용률을 현재 대비 10%포인트 높일 경우, 무탄소 전력 충당률이 평균 11.6%p 증가하고 초과수요는 연간 21.6TWh 줄어들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기업 탄소중립, 정부 손에 달렸다…인센티브 시급
정부가 기업의 탄소중립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선, 탄력적이고 현실적인 에너지 정책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산업계에 따르면 기업이 무탄소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체결하는 PPA는,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 외에 망 이용료, 전력기반기금 등 부대비용이 더해져 kWh당 279.9원이라는 높은 가격 부담을 초래하고 있다.
이같은 부담을 완화하려면 정부가 ▲망 이용료 한시적 면제 ▲전력기반기금 감면 ▲PPA 설비투자 보조금 도입 등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 일본은 발전설비 투자비의 최대 1/3을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무탄소전력을 활용하는 기업에게는 인센티브도 관건이다. 전문가들은 “PPA 체결 기업에 대해 정부 조달, R&D, 금융지원 등에서 우대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업단지 내에서 무탄소전력 공급을 확대하는 시범사업 지구 운영도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방법으로 대두된다.
결국 민간 중심의 PPA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제도적 기반도 필요하다. 정부는 장기계약 거래를 촉진하기 위해 PPA 거래 중개 플랫폼을 구축하고, 공공기관이 초기 수요자(앵커) 역할을 맡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