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체계 개편 없이는 대규모 정전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0여년 태양광·풍력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는 등 전력 수급 변동성이 커진 시점에 전력시장의 구조적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전력도매시장의 경직된 가격 구조는 재생에너지 신규 발전설비 투자 유인을 낮추고 있어서다.
현재 전력시장 참여자는 10개사에서 6천여 개사로 늘었고, 전력 수요도 257.7TWh에서 546.0TWh로 두 배 이상 증가했고,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0.04%에서 8.5%로 확대됐다.

고정 단가 의존...재생에너지 상황 반영 못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응한 전력도매시장 구조 개선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 18.8%, 2038년 29.2%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기상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출렁이는 특성 탓에 안정적 전력 공급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현재 국내 전력도매시장은 전력량·용량·보조서비스로 나눠 가격을 산정한다. 하지만 이 구조가 시장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력도매가격은 연료비 기반의 변동비 평가 방식으로 산정돼, 변동비가 거의 없는 재생에너지는 가격 신호가 무력화된다. 용량 가격도 정부가 정한 고정 단가에 의존하고 있어, 기술 발전·환경 규제·금융비용 변화가 반영되지 않는다.
보조서비스 가격 역시 총배정액을 고정해 두는 방식이라 수요가 늘수록 단가가 오히려 떨어진다. 실제2021~2024년 사이 보조서비스 수요는 33% 늘었지만, 단가는 하락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그 결과,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유연성 설비 투자가 지체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ESS조차 수익을 내지 못하는 구조라면 시장의 대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물가상승률 반영 수준...예비 전력 확보 걸림돌
영국과 미국 등 주요국 전력도매시장은 시장 원리에 따라 가격을 유연하게 산정한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영국은 태양광·풍력 확대에 따라 용량 가격이 동반 상승했고, 이는 이론적 예측과 부합한다. 미국 PJM·ISO-NE도 가스 가격 변동과 연동해 용량 가격이 탄력적으로 조정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고정 단가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국내 전력도매시장은 물가상승률 반영 수준에 머물러, 시장 환경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비 전력 확보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KDI는 보고서에서 ▲전력도매가격의 경쟁 입찰제 전환 ▲용량 가격의 시장 기반 결정 ▲보조서비스 가격의 수요 연동을 핵심 정책 과제로 제시했다.
전력도매가격 산정 방식의 경우 지금은 전력거래소가 발전소의 연료비를 기반으로 변동비를 평가해 가격을 정하는데, 태양광·풍력처럼 변동비가 거의 없는 재생에너지에는 이 방식이 전혀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재생에너지는 도매시장에서 입찰 경쟁 없이 우선 구매되는 구조가 고착돼 왔다.

발전사가 시장 입찰 통해 경쟁하는 구조 돼야
KDI는 “발전사들이 직접 가격을 입찰해 경쟁하는 구조로 전환해야만, 전력도매가격이 시장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고 출력제어 기준도 명확해진다”고 강조했다.
용량 가격 역시 과거 접근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1998년 신인천복합발전소 건설비를 기준으로 고정 단가를 산정하고 매년 물가상승률만 반영하는 방식이다. 기술 발전이나 환경 규제 강화, 금융비용 변화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셈이다.
KDI는 “해외 주요국처럼 시장 입찰을 통해 용량 가격을 정해야 한다”며 “경쟁을 통해 소비자 부담은 줄이고 투자자는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조서비스 가격은 총배정액을 미리 정해 두고 직전 연도 공급 실적으로 나눠 단가를 산정하는 방식이다. 이 탓에 보조서비스 수요가 늘면 오히려 단가가 떨어지는 ‘역(逆)인센티브’가 발생한다. 주파수·전압 안정화 같은 핵심 서비스 공급이 늘수록 투자 유인이 사라지는 구조인 셈이다.
KDI는 "단기적으로는 총배정액을 조정하고, 장기적으로는 ESS 같은 유연성 설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요에 따라 가격이 움직이는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독립 규제기관의 권한을 강화해 시장 왜곡을 최소화하고, 도매시장 가격 변동이 소매요금에 합리적으로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