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의 탈탄소 전략이 날로 정교해지고 속도도 붙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은 물론 기후·탄소, 자원순환, 생물다양성, 노동·인권 등 ‘지속가능성’ 전반에 걸친 규제체계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RE100, 탄소감축은 기업의 ‘수출 생존권’으로도 직결된다. 한국 기업들도 기존의 ‘환경친화적 이미지 구축’을 넘어서, 탄소 효율성과 공급망 관리 역량을 강화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RE100(재생에너지 100% 전환)’에 뛰어들었지만 국내 기업의 이행률은 2022년 기준 12.5%로, 글로벌 평균 39%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탄소 집약도 개선 속도 역시 주요 교역국에 비해 뒤처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속도전, 선진국은 이미 앞서
미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석탄 비중을 32.8%에서 11.5%로 낮췄고, 재생에너지 비중은 5.6%에서 8.2%로 증가했다. 천연가스는 29.9%에서 46.3%로 급증해 석탄을 대체하고 있다. EU는 변화의 폭이 더 크다. 1990년 9.5%였던 재생에너지 비중은 2023년 43.2%로 다섯 배 가까이 늘었고, 석탄은 41.7%에서 16.5%로 급감했다. 천연가스, 원전도 조정되며 에너지 전환의 무게 중심이 확연히 바뀌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자본을 앞세워 에너지 전환에 '굴기' 수준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 3년간(2021~2023년) 연평균 59%씩 증가한 투자로 6,760억 달러를 쏟아부었으며, 이는 미국의 두 배를 넘는 규모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관련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판을 바꾸고 있다.
EU와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규제망을 더욱 촘촘히 엮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2023년 시범 도입된 이 제도는 2026년부터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역외 수입품에 탄소세를 부과한다. 실질적인 무역 장벽이다.
이외에도 EU는 지속가능성 실사 의무(CSDDD), 디지털 제품 여권(DPP), 배터리 규제(EUBR), 에코디자인규정(ESPR) 등 공급망 전반에 걸친 정보공개와 성능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제품이 EU 역내에 유통되지 않더라도, 고객사나 투자자로부터의 정보요청이 기업에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다. 미국 역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기후공시 의무화 규제 등을 통해 유사한 규제 기반을 구축 중이다.
한국 기업, RE100 벽 앞에서 멈춰서다
한국 기업들의 대응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한국 내 RE100 선언 기업의 40%는 “재생에너지 확보 자체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공급 부족, 제한적인 조달 수단, 이행 수단의 신뢰성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전력 계통 보완, 이격거리 규제 완화, 직접 전력구매계약(PPA) 기준 개선 등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에너지 전환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지금처럼 대응이 늦어진다면, 한국 산업은 향후 10년간 최소 1조~2.7조 원 규모의 추가 비용 부담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석유·석탄 제품 제조업과 화학 제조업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27일 국회서 열린 ‘국가 산업경쟁력 도약을 위한 에너지전환 방향과 과제 토론회’에서 '주요국 탈탄소 법제 동향과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과제'를 발표한 서정석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전문위원은 “주요 고객사 중심의 정보 요구는 오히려 강화될 수 있는 만큼 지속가능성 전반을 체계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용 시기와 대상기업 축소 등으로 완화 조치를 담은 EU 옴니버스 패키지,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 변화 등 대외 여건 변화에도 한국 기업과 정부가 마주한 선택지는 더 분명해졌다. 선제적 투자를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창출하는 일이다. 탈탄소는 지연되는 과제가 아니라 산업 생존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정석 전문위원은 "EU CBAM과 미국의 관련법(CCA, FPFA) 도입으로 국내 경제에 2025년부터 향후 10년간 최소 1조원 안팎에서 최대 2.7조원의 추가 비용이 유발될 것"이라면서 탄소효율의 선제적 관리를 통한 규제 비용 최소화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EU는 지난해 4월 기업의 지속가능성(환경, 인권/노동) 실사 체계 구축 및 실사 의무화 법안(CSDDD)을 도입했다. 실사와 개선 및 조치, 모니터링, 결과 공시 등의 절차를 담고 있다.
또 2023년 5월 도입한 CBAM은 탄소 감축 및 자국 산업 보호(탄소 누출 방지)를 위해 EU 역외 기업을 대상으로 탄소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작년 7월엔 역내 시장에 출시되는 모든 물리적 품목에 에코 디자인 기준 및 정보를 요구하는 규정인 에코디자인규정(ESPR)을 도입했다. 내년 우선 순위 품목군의 세부 이행 기준을 마련하는대로 2027년 시행될 예정이다. 우선 순위 품목군으로는 철강, 알루미늄, 섬유, 타이어, ICT 제품군 등이 있다.
이들 품목은 규정에 따라 재사용/재활용 가능성, 유해물질 함유량, 탄소발자국 등의 성능 기준 충족이 필요하며 소재-공급망-우려물질, 안전 등의 정보를 디지털 제품 여권(DPP)에 저장해야 한다. 특히 EU에 직접 수출하지 않더라도 공급망에 포함되거나 EU 고객이나 투자자로부터 정보 요구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에코 디자인 관련 정보 관리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작년 2월부터 적용된 EU 배터리규제(EUBR)는 오는 2031년부터 배터리 원재료 재활용 비율 의무화를 이행해야 한다. 이동식, 전기차, 산업용 등 모든 배터리 유형이 대상이며 탄소발자국 의무화, 생산자책임활용 제도(EPR), 폐배터리 처리 기준-발생 방지 및 관리 정보 제공 등을 담고 있다.
EU 녹색분류체계(Taxonomy)는 그린 딜의 금융 수단이다.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수자원과 해양자원의 지속가능한 사용과 보호, 순환경제로의 전환, 오염방지와 관리, 생물다양성 등 6개 환경 목표에 부합하는 경제활동에 대한 분류 기준이다.
기업과 투자자, 정책입안자들이 기업의 활동을 식별 및 분류에 필요한 표준화된 방법을 제공해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올해 초 직원 500명 이상의 EU 역내 상장 대기업 공시에 이어 내년 1월 EU 역내 대기업 공시로 확대된다.
친환경 및 지속가능성 관련 표시·광고에 대한 규제도 이어지고 있다. 개정 작업 중인 미국 연방거래위원회 그린 가이드(FTC Green Guide)가 대표적이다. EU는 최종안을 도출 중인 그린 클레임 지침(Green Claims Directive), 지난해 2월 발효된 '녹색전환을 위한 소비자 권한 위임 지침' 등이 있고, 영국은 2021년 시행한 경쟁시장국(CMA)의 그린 클레임법(Green Claims Code), 지난해 5월 시행한 금융당국청(FCA)의 지속가능한 정보 공시 및 투자 라벨링 규제 등이 있다.
한국은 2023년 9월 개정된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대한 심사지침, 환경성 표시광고 관리제도에 관한 고시 및 친환경 경영활동 표시광고 가이드라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