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상흔이 인간의 몸과 마음, 관계에만 각인된 건 아니다. 팬데믹 장기화로 의료용을 비롯한 제약 산업 전반에 플라스틱 폐기물이 크게 늘었다. 사실 의료 및 제약 분야에서 플라스틱은 보건상 이점과 뛰어난 다용도성으로 필수 불가결한 소재다.
문제는 사용 이후 처리다. 위생의 이유 등으로 멸균과 같은 관리가 필요하지만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폐기물은 주로 매립지에 묻히거나 관행을 들어 부적절한 방법으로 소각된다. 특히 효과적이지 않은 소각로 처리는 독성 화학물질과 가스 배출 등 대기 오염 문제도 유발한다.
결국 재활용도 적은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오염물질이 묻었는지 알 수 없어서 분류나 세척이 어렵고 충분한 기술 개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용한 플라스틱 추적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에는 비용 문제가 결부돼 있다.
인간을 돌보는 의료 산업 전반이 플라스틱 용기 등으로 되레 일상과 환경을 위협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제약 산업을 ‘숨은 환경오염 업종’으로 부르는 이유다.
적합성 평가, 낮은 약가, 소비자 파워 등 첩첩산중
시장조사기관 마켓앤마켓스(Market and Markets)는 의료용 플라스틱 세계시장 규모를 2019년 기준 228억 달러(한화 약 31조3400억원)로, 2024년까지는 317억 달러(약 43조5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시장 크기에 비례해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 규모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자료에 따르면 제약 산업이 배출하는 폐기물은 매년 3억 톤에 달하고 그 중 절반이 일회용이다. 환경부 환경성 평가 체계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유추하면 국내 제약업종은 대기오염물질을 연간 평균 1151톤 배출한다. 이 가운데 포장 용기 대부분은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이나 폴리프로필렌(PP)으로 이뤄져 있다.
가령 약국에서 제약사가 만든 약을 공급받을 때 이중삼중 포장에 개별 비닐 포장까지 더해지면 약 하나를 둘러싼 플라스틱은 치명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많다. 국제의약품제조협회연맹(IFPMA)은 4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플라스틱 국제협약 4차 회의에서 “의료 및 의약품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을 보장하되 안전하게 플라스틱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확보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놨다.
다만 혁신적인 제약업계를 아우르고 있는 IFPMA는 "지속 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했다. 또 "높은 보건 및 안전 요건으로 인해 기술 및 시장 개발에 제약이 있"지만 "의료 및 의약품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이나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실용적인 솔루션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 부문에서 환경 보호의 주제는 최고 수준의 환자 안전과 의료 및 의약품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것과 함께 진행돼야 하는 현장의 이해를 강조한 셈이다.
제약업계가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거나 용기를 바꾸는 건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생명에 직접 영향을 주는 ‘약’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일단 △적합성 평가 △소량 포장 단위 공급 규정 등 다양한 규제에 맞추는 게 까다롭다. 낮은 약가와 소비자의 영향력 등도 무시할 수 없다. 약 유통기한에 따라 계속되는 시험도 부담이다.
재활용 전제로 플라스틱 제조해야...비용이 난제
기본적으로 의료용 폐기물은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생활 폐기물과 함께 배출해선 안 된다. 대개 의료용 폐플라스틱은 작게 조각내 높은 온도로 가열한 뒤 오염을 제거해 생활 폐기물과 함께 내보낸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지 않은 채 폐기되는 의료용품도 많다.
의료용 폐플라스틱 재사용이나 재활용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대개 재사용을 위해 멸균 공정을 활용하나 양이 많지 않다. 의료용이라는 특정 용도를 위한 제작 과정에서 플라스틱 소재의 화학적·열적 특성, 멸균처리 가능 여부 및 내구성 등 종합적 주의와 선택이 요구된다.
감염 위험에 따른 사회적·윤리적 우려도 상존한다. 재활용 분류 등에 참여하는 노동자가 보건 위험에 노출될 수 있으므로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생분해성이나 바이오 플라스틱 필요성을 강조한다. 분해되지 않는 일회용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전제는 의료용 플라스틱을 처음에 생산할 때부터 재활용을 염두에 두고 설계해야 한다. 폐기물 재활용 시 기능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연구와 기술 개발이 계속 요구되는 비용이 걸림돌이다. 의료용 플라스틱 디자인은 재활용 가능성과 비용 효율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엄격한 가이드라인 토대에 솔루션도 바꾼다
이런 가운데 현재 국내외 제약업계는 의료용 플라스틱 폐기물 절감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펼치고 있다. 2023년 글로벌 매출 상위 5개 제약업체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로슈(Roche), 머크(Merck), 화이자(Pfizer), 애브비(Abbvie) 등은 의료 플라스틱 제조 및 플라스틱 폐기물 대응에 남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이미 기업 사명 선언문에 ‘환경과 천연자원 보호’를 추가했던 존슨앤존슨은 콘택트렌즈 등 일회용 의료기기 재활용, 안전한 반품 프로그램 등을 통한 순환성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로슈는 폐기물 발생을 줄이는 한편 재활용률을 80% 이상으로 늘리는 목표를 잡았다. 이를 위해 재사용 가능 신발 커버를 통해 매년 약 30만 개의 일회용 신발 커버 매립을 없앴다. 또 화학 제조 공정을 개선, 연간 65톤(약 40% 감소)의 유기용제(물질을 녹일 수 있는 액체 상태 유기 화학 물질) 소비를 줄였다. 더 나아가 화학 폐기물과 의료 폐기물 매립을 금지하는 등 폐기물 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플라스틱 절감에 다양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머크는 2015년 시작한 바이오의약품 재활용프로그램 일환으로 일회용 플라스틱 폐기물을 수거해 플라스틱 목재로 재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을 23개 주요 고객사에 제공한 이래 약 1만 1045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했다. 또 플라스틱 폐기물을 처리하고 재활용업체로 쉽게 이송할 수 있는 솔루션도 만들었다.
화이자는 연구 개발, 제조, 운영 프로세스 전반에 개선 작업으로 포장재 및 플라스틱 자재를 줄이는 한편 재사용, 재활용에 나서고 있다. 2019년 이후 매립지로 보내는 폐기물 양을 540만kg 이상 줄였다. 애브비는 직원 등 이해관계자들의 인식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 탈탄소화, 생물다양성, 친환경 화학 이니셔티브 등에 대한 교육과 에코 챌린지 개최 등으로 지속가능한 습관 형성을 돕고 있다. 또 생산 라인 일부를 재사용이 가능한 설비로 교체하거나 기존 니트릴 장갑을 생분해성 대체품으로 바꾸는 등 사내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친환경 포장 그쳐...국내 의료업계 ESG 갈 길 멀다
매출 상위권 기준으로 국내 제약사 현황을 살펴보면 글로벌 제약사들에 비해 소극적이다. 일단 친환경 포장, 용기 단순화, 폐기물 처리 관리 등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유한양행은 한솔제지와 협력해 친환경 패키징을 개발하고 의약품 제품 케이스를 없애는 포장 변경을 꾀했다. 또 폐기물 절감을 위해 재활용 가능한 폐기물은 재활용업체를 통해 위탁 처리하고 폐수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슬러지를 소각하지 않고 연간 약 80톤에 달하는 물량을 재활용하고 있다.
종근당은 2030년까지 재활용률 70% 달성을 목표로 의무 소각 대상을 제외한 폐기물을 재활용하고 있다. 97.78%의 순환 이용률을 달성했다. 또 친환경 포장을 적용하는 정책을 펴는 한편 리사이클 원료 함유 포장재 등을 통한 녹색인증 취득을 목표로 삼고 있다. 대웅제약도 친환경 포장재 사용을 확대하고 용기 단순화를 통한 플라스틱 배출 감소에 나서고 있다.
신제품 개발 시 3R(Reduce, Replace, Recycle)을 적용하는 녹십자는 2021년부터 약 2백만 개 플라스틱 사용을 절감했다. 한미약품은 2020년 포장박스를 100% 재활용 용지로 전환했고, 2023년부터 녹색제품 사용을 우선에 두고 있다.
이렇게 국내 제약업계는 미흡한 규제 환경 등으로 친환경 패키징 등 단순 친환경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의약품 생산, 폐의약품 처리 등도 환경과 밀접한 관련은 있지만 전반적인 인식과 실천은 글로벌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이다. 반면 글로벌 제약사들은 점증하고 있는 세계의 규제 제도와 친환경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종합적인 ESG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의료용 플라스틱 재활용 데이터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팬데믹을 거치며 급격하게 늘어난 의료용 플라스틱 생산은 재활용 대응 역량을 넘어선 상태다. 재활용 장려와 권고는 더 이상 효과적이지도 않다. 재활용 기반 시설은 물론 플라스틱 종류와 올바른 분류 방법 등 의료 산업 종사자들의 인식 개선이 더 강화돼야 한다. 국내외에 본격화할 ESG 공시, 기후공시 등을 고려하면 정부 지원과 투자, 전문성 강화가 요구된다. 특히 제약 산업과 재활용 산업의 실질적인 협력 체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